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바로사 작전 (문단 편집) === 독일의 의도 ===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파시스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의 원인을 [[배후중상설]]로 믿고 있었다. 즉, 독일 제국이 무너진 것은 독일군이 연합국에 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 내부에서 사보타지를 일삼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지도부에 유대인이 많은 소련에 대해 유달리 적대적이었다. 여기에 인종주의가 결합하여 게르만족은 슬라브족을 유라시아에서 몰아내고 그곳을 [[레벤스라움]]으로 만들어야 번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히 소련과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마치면서 칼 끝을 소련으로 돌렸다. 비록 [[영국 본토 항공전|항공전]]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서유럽에서 독일의 패권은 확고했고,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하기로 한다. 이에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이 굳이 전선을 늘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기는 했으나 소련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별 차이가 없었다. 예외적으로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리벤트로프]]는 이전에 소련의 인력과 미국의 물자가 합해지면, 어떤 시너지를 낼지 모른다며 경고했다.[* 이는 미국이 소련에 [[렌드리스]]를 통해 증여한 비전투 물자가 썩어나기 시작하자 비전투 물자의 직접 생산을 축소시키고 군수 공장에 인력을 집중시켜 만들어낸 [[모신나강]], [[PPSh-41]], [[T-34-76|T-34]]를 쓰는 끝이 없이 밀려오는 군대로 실현되었다.][* 사실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소련의 발을 묶어두고 유럽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나치 독일한테는 이득이었다.] 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 이유는 그 무엇보다 그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맺어진 소련과의 평화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에 분명 소련과의 전쟁이 있을 거라 예상했고, 수많은 천연 자원과 인력을 가진 소련이 힘을 키운 뒤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가면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수많은 혼란으로 인해 비교적 약해진 소련이, 국력을 회복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훗날 있을지도 모르는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겨울전쟁]]에서의 붉은 군대의 부진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처형되는 등 뛰어난 지휘관이 부재했던 것 또한 그의 결정을 도왔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었다.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국가로서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는데 히틀러는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로 봄으로써 한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생활 공간과 자원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는데 이에 따라 [[게르만]] 민족(나치 독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당시 소련 영토)의 곡창지대(식량 필요), [[캅카스|코카서스]]의 유전(전차, 장갑차 연료 필요), [[우랄 산맥]]의 광물, [[시베리아]]의 목재 등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들을 결국 소련에게서 빼앗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는 당시에는 중립국인 미국이 영국에 대한 지원정책을 지속하는 것을 보며 언젠간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가진 미국을 상대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 전에 소련의 자원과 인력을 미리 확보하기 위함도 있었다. 또한 경제적인 또 다른 문제로서, 당시 독일은 [[메포어음]]이라는 어음을 발행하여 인플레이션 없이 통화량을 늘리는 편법을 사용해 경제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갚아야 할 돈을 계속 늘리고 있었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는 금본위제라는 국제 경제 질서 하에서 돈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금을 확보해야 했고, 당시 스페인 내전 이후 잉카에서 가져왔던 스페인 제국의 금이 무기 대금으로 소련에 넘어갔기 때문에 이 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련을 굴복시켜 강탈해야 했다. 사상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어차피 양쪽 다 알고는 있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이야 고작 휴전일 뿐인 데다가 [[나치즘]]이란 사상과 [[견원지간]]인 [[공산주의]]를 말살하겠다는 사상적 목표도 덤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나치 독일에게 유럽에서 큰 위협이 되는 [[소련군]](붉은 군대)을 조기에 제거하고 동부전선을 조기 종료시켜놓은 다음 육군 예산을 절감하고 그 절감한 비용으로 영국 상륙에 더 중요한 해군(섬나라기 때문)과 공군(영국 폭격)을 증강시켜서 다시 한번 완전히 성공시키지 못한 대영 작전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즉, 경제, 사상, 군사적 여러 목적들로 소련을 침공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히틀러의 생각은 대강 이렇다. 1.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도 군수 시설에 큰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안 유럽 본토에는 신경쓰지 못할 것.[* 거기다 영국은 이미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와 싸우고 있었고 여기서도 영국군 단독이 아니라 영연방군(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등)도 적지 않게 투입된 상황이었다.] 1. 피해를 복구하는 동안 영국은 미국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음.[* 당시 영국이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미국 뿐이었다. 서유럽 본토는 독일에게 완전히 점령되었으며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수상이었던 처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1. 일단 피해 복구로 바쁜 영국에 의한 본토 위협이 없는 동안 독일은 소련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1. 동맹국 일본이 우릴 도와서 소련을 공격[* 그러나 독일은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은 1941년 4월에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는데, 이를 체결하기 전에 일본의 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가 베를린을 방문해 이를 알린 바 있지만 독일은 이에 대해 딱히 아무런 메시지를 주지 않았으며,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일본에게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일본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벌어지자 크게 당황했다. 기밀 유지를 명목으로 아무런 사전합의도 안 했고,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걸 막지도 않았는데 전쟁이 벌어지면 도와주겠지? 라는 식으로 상당히 엉성했던 외교관계였다. 그래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일본 군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에도 '''이 불가침조약을 깨지 않았다.'''] 1. 그러면 소련군 병력이 한쪽으로 쏠리는 일은 없을 것. 1. 적당한 시점에 조약을 맺고 미국의 귀를 막아 버리면[*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주변인들이 상기시켜 줬지만 히틀러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자 좋다고 같이 선전포고를 했다.] 미국이라는 지원국을 잃어버린 영국을 휴전 협상장에 끌어내거나, 아니면 영국 본토 침공을 다시 계획해볼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